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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사업, 본격적으로 막 오르다

      '워싱턴 이승만 건국대통령 기념관' 건립 사업이 급물살을 탄다. 기념관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미 대사관 역할을 했던 '구미외교위원본부' 건물을 개조해 마련할 계획으로, 건물 매입을 위한 기금모금 운동 역시 본격적으로 추진된다.     현재 교회로 사용되고 있는'제4기 구미외교위원본부(1944~1956년)'는 워싱턴 DC  노스웨스트 16가 지역에 위치했다. 건물 매입을 선도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양동자 박사(이승만-박정희 기념 연구 교육 재단 이사장)는 "본부 매입을 위한 기금모금 운동을 한국과 미국 전역에서 시작한다"고 알렸다.     10여년 전부터 '워싱턴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위한 청사진을 마련해 온  양 박사는, 지난  7년 간  건물을 사용하고 있는 교회에 출석하며 관계자들과 친분을 쌓아왔다. 이런 결과, 교회 측은 양 박사에게 건물 판매 의사를 직접적으로 전달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건물의 공시지가는 136만 달러, 그러나 워싱턴 DC 부촌에 0.26에이커 부지에 총 7835 평방피트 규모로 위치한 해당 건물의 시세는 250만 달러(추정)에 달한다.    그러나 양 박사는 건물 매입에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우선 양 박사 스스로 50만 달러의 사재를 출연할 예정이며, 이승만 대통령 기념사업에 뜻을 같이하는 한국내 기업가, 유명인사들이 기금을 보태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에 더해 "미국 전역에서의 기금모금 운동이 성공적으로 진행 될 것이며, 한국 정부 부처에서도 도움 받을 것으로 기대해, 자금 마련에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본다"라고 양동자 박사는 낙관하고 있다.     지상 3층 주택으로 지어졌던 구미외교위원본부 건물은 2017년 증축됐다. 후면은 예전의 모습 그대로이나, 전면에서 보면 전형적인 미국식 교회의 모습이다.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으로 건물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또 한번의 대대적인 리모델링 작업이 필요하다. 예전의 모습을 간직한 건물의 후면부 일부 시설은 지독하게 낡아 사용하기에 위험이 따를 정도다.  양박사는 1,2층을 기념관, 3층은 전문가 및 관련 전공자들을 위한 '연구소'로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일제 치하 36년을 끝내며 다시 빛을 찾은 날'. 8.15 광복절 79주년을 맞는 날, 양 박사는 독립운동을 위해 온 몸을 바쳤던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업적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특히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를 무대로 활약했던 이승만 대통령을 기리는 기념관이, 워싱턴DC에 마련되어야 한다는,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워싱턴 이승만 건국 대통령 기념관' 건립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와 한성정부 집정관 총재로 추대됐던 이승만 당시 임시정부 대통령이 설치한 워싱턴DC 구미외교위원본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를 담당하는 본거지로 해외 독립운동 및 유럽과 미국을 활동대상으로 하는 '대사관'으로 기능했다. 이 대통령은 필라델피아에서 임시정부 공식대표로서 서재필 박사가 운영하던 '대한민국 통신부'와 프랑스 파리에 설치됐던 '주파리위원부'를 통합해 '구미외교위원본부'로 운영한 것이다.     구미외교위원본부는 독립운동이 본격화되던 1919년부터 해방 이후까지 30여년간 총 4곳을 옮기며 일제의 잔혹한 침략상과 한국이 처한 현실 등을 미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세계 각국으로 알렸다. 영문월간지 '한국평론(Korea Review)'과 단행본 '어린이 순난', '대한정신' 등을 발간하고 각종 강연회와 연설회를 개최해 외교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미국과 일본 간의 태평양 전쟁 막바지인 1944년 마련돼 해방, 대한민국 건국 및 한국전쟁을 관통하는 시기에 사용된 4기 본부 건물은 미국정부와 이승만 대통령 간의 치열한 접촉과 외교적 회동이 이뤄졌을 것으로 짐작되는 역사적의 장소이기도 하다.     양동자 박사는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혼이 서린 이 건물이야 말로, 어쩌면 한국에 조성되는 기념보다 더 적격인 '이승만 기념관' 장소일 수 있다"면서 "기금모금 운동이 미주 한인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대대적인 사업으로 전개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런 가운데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은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옆 용산가족공원에 들어선다. 현재 공터인 국립중앙박물관 동쪽이다. 재단이 해당 장소를 기념관 부지로 선정한 건 인근에 대통령실 등이 있어 초대 대통령을 기리는 장소로서 상징성을 갖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가장 빨리 착공할 수 있는 부지로 2~3년 안에 개관할 수 있으며, 관광객이 방문하기 좋은 위치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의 기념관 역시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정부 예산만으로도 건립할 수 있으나 건립 비용 전체의 30%만 정부 예산에서 지원받고 나머지는 범국민 모금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시작해 현재까지 132억원가량을 모았다.       한편, 79주년 광복절을 맞는 소감에 대해 양동자 박사는 이 날이 '건국절'로 기념되어야 한다는 뜻을 다시금 밝혔다. "8월15일이 언제까지 광복절로 불려야 하나"고 되묻는 그는 또다시 불거진 '건국절 논란'에 "정치이념에 따라 명백한 역사적 팩트 마저 논쟁거리가 되는 현상에 가슴 아프다"고 전했다.       대한민국의 야당 및 지지세력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임시정부에 두고 있으며 건국 원년을 1919년으로 본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친일파, 친미제국주의자 등으로 몰아세우며 '건국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에 반해 윤석열 대통령  및 여당은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 사업을 힘을 쏟고 있으며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과도기적 형태의 정부이며 "1948년 8월15일이 대한민국의 건국일"이라는 입장을 직간접적으로 취하고 있다.     지난해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을 다룬 영화 '건국전쟁'이 신드롬 수준의 인기를 끌며, 이승만 건국대통령에 대한 재평가가 국민적 합의를 이루는 듯 보였으나, 야당의 총선거 승리 이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조명' 분위기도 묻히는 분위기다. 이런 까닭일까? 워싱턴 주미대사관에 조성될 것으로 발표된 '이승만 대통령 동상'의 건립사업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모양새다.    양동자 박사는 "보훈부 등에서 확실한 사업 진행 상황을 알리지 않고 있어, 독자적으로 워싱턴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이라도 이루겠다는 신념으로 행동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워싱턴에서 지난 2016년 '이승만 기념 연구 교육 재단'을 창립한 양동자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 연구에 정통한 전문가다. 양 박사는 "국부 이승만 대통령의 지도력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다"고 단언하며 "미국의 민주주의를 직접 겪으며 학습한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이 된 것이 민족의 역사를 바꾼 '하나님의 한 수'"라고 표현했다.  특히 "40년의 대미 외교 경험, 고급 영어 구사 능력, 그리고 누구보다도 투철한 애국심이 그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가졌던 건국 대통령으로서의 자질"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양 박사는 "그런 이 대통령의 주무대였던 워싱턴에 기념관을 설립하고, 미국의 차세대, 차차세대 동포들이 이 대통령을 배울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나는 물론 우리 세대의 사명"이라고 역설했다.     대학 시절 4.19를 겪었다는 양동자 박사는 그 당시에도 이승만 박사의 동상을 끌어내리는 성난 시위대를 보고 "이해할 수 없었고, 일말 분노했다"고 회상했다. 이기붕 부통령을 중심으로 부패한 자유당 정권이 진행한  3.15 부정선거에 노령의 '국부'는 모든 책임을 떠안고, 하야했고, 미국으로 떠나 쓸쓸히 생을 마쳤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애잔함은  단순히 양 박사 뿐만이 아닌 그 당시 평범한 다수의 국민들이 느낀 공통적인 안쓰러움이었다.   한편, 양동자 박사는 1967년부터 2007년까지 하워드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미국 태권도연맹 및 팬 아메리카연맹 회장, 세계 태권도연맹 법사위원장, 미국 올림픽위원회(USOC) 상임위원, 세계체육학회(ICHPER-SD) 회장 등을 역임한 워싱턴 한인 1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250만 달러의 건물 매입 기금과 대대적인 리모델링 비용. 만만치 않은 사업에 대한 부담감은 없을까? 양 박사는 '플랜B'를 이미 마련한 상태다.  지난 8월 초, 기자단을 이끌고 찾아간 '플랜 B' 그 곳은 양동자 박사의 메릴랜드 풀스빌 저택이었다. 저택은 8에이커의 웅장한 대지 위에 자리잡았다. 청기와를 올려놓은 저택은 웅장하면서 다소곳했다. 그리고 양 박사는 그 햇살 가득하고 너른 부지에"구미외교위원 건물 매입이 좌초될 경우,  '워싱턴 이승만 건국 대통령 기념관'이 들어설 수 있다"고 알렸다. 그리고 양 박사는 저택에 보관된 각종 자료와 기념물들을 기자에게 보여주며 일일이 설명했다.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위한 타오르는 열정이 빛났다.     박세용 기자 [email protected]워싱턴 이승만 이승만 대통령 워싱턴 이승만 기념관 건립

2024-08-15

8.15... '광복절' 아닌 '건국절'로 확대-기념해야

    '일제 치하 36년을 끝내며 다시 빛을 찾은 날'. 8.15 광복절 78주년을 맞았다.  그리고 8월15일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75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날이기도 하다. 1945년 해방 이후 1948년 7월17일 헌법이 제정되고 세 달 후인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8월15일이 언제까지 광복절로 불려야 합니까."   지난 10일 본보를 찾은 양동자 박사의 자조 섞인 물음이었다. 광복절을 맞는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양 박사는 "앞으로 8월15일은 건국기념일, 대한민국 건국절로 국민은 물론 전세계인들에게 각인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양 박사가 이렇게 언급한 이유는 한국에서 한창인 '건국절 논란' 때문이다.  전임 문재인 정부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임시정부에 두고 있으며 건국 원년을 1919년으로 보았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친일파, 친미제국주의자 등으로 몰아세우며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공산주의자들을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으로 승격시켰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가 시작된 이래 정부는 '이승만 기념관' 건립 사업에 힘을 싣는 가운데, '1948년 건국'을 공식화 하는 모양새다. 이에 더해 지난 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독립유공자 및 유족 158명과 8•15 광복절 기념 오찬을 하면서 윤 대통령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위한 건국 운동‘" 이라고 표현했다.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과도기적 형태의 정부이며 "1948년 8월15일이 대한민국의 건국일"이라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반면에 '광복회'는 정반대의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종찬 광복회 회장은 지난 6월 "대한민국의 원년은 1919년"이라고 발언하며 기념관이 "이승만을 신격화 하는 '괴물 기념관'"이라고 말해 물의를 빚었다. 이는 지난해 10월 사망한 김원웅 전 광복회 회장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한다. 그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친일정권'으로 규정하며 1948년 건국을 부정했다. 이에 대해 양동자 박사는 "이런 망언을 하는 '광복회'를 과연 대한민국을 위하고,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애국자들을 기리 단체라고 봐야 할 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광복절'인 8월15일이 우리가 스스로 독립을 이룬 날도 아닌데, '일제로부터의 해방'보다는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건국일을 기념하는 게 올바른 일"이라며 "워싱턴 등에서 열리는 각종 기념식에서도 '광복'보다는 '건국'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양 박사는 1967년부터 2007년까지 하워드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미국 태권도연맹 및 팬 아메리카연맹 회장, 세계 태권도연맹 법사위원장, 미국 올림픽위원회(USOC) 상임위원, 세계체육학회(ICHPER-SD) 회장 등을 역임한 워싱턴 한인 1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런 양 박사가 현재 가장 힘쓰는 일은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독립운동 거점이자, 한미동맹의 기초를 다졌던 워싱턴에 그를 기리는 대통령 기념관을 세우는 일이다.     한국에서는 벌써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 추진이 한창 진행 중이다. 지난 6월  말, 김황식 전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 추진위원회’가 발족하면서 서울에 기념관 건립을 추진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인수, 박지만, 노재헌, 김현철, 김홍업 등 이승만, 박정희,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 자제들이 추진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됐으며 한화갑 한반도평화재단 총재를 비롯한 진보, 보수진영의 많은 원로가 기념관 건립 추진에 뜻을 같이하고 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의 기념관이 논란 속에서 아직도 추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영화인 신영균 회장은 서울 한강 변 개인 부지 4000평을 기념관 건립을 위해 기부한다고 밝혀 '이승만 기념관' 사업은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워싱턴에서 지난 2016년 '이승만 기념 연구 교육 재단'을 창립한 양동자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 연구에 정통한 전문가다. 양 박사는 "국부 이승만 대통령의 지도력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다"고 단언하며 "미국의 민주주의를 직접 겪으며 학습한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이 된 것이 민족의 역사를 바꾼 '하나님의 한 수'"라고 표현했다.    1894년 개화사상에 눈을 떠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한 이승만은 '천재'로 불릴만한 인재였다.    서재필 등 운동가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 '매일신문' 창간에 함께한 이승만은 독립협회 관련 투옥된 후 기독교로 개종했다. 감옥에서 영어공부에 몰두한 이승만은 미완성 상태이지만 사실상 최초의 '영한사전'을 만들기도 했다.    이승만의 감옥 생활은 장장 5년7개월이나 계속됐다. 석방된 이승만은 유학을 결심하고 미국으로 향한다. 인터뷰 과정을 거쳐 조지 워싱턴 대학 3학년에 파격 편입한 이승만은 독립운동과 학업을 병행하며, 조지 워싱턴대 학사, 하버드 대 석사, 프린스턴 대 박사 학위를 받는다. 한국인 최초의 미국 박사학위 취득자였다.       미국을 주무대로 독립운동에 힘쓴 이승만 박사의 명성은 한반도 땅에서도 자자했다. 1919년 3.1운동을 통해 각성한 애국지사들을 중심으로 국내외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선포됐는데, 그 중 8군데의 임시정부에서 이승만 박사를 국무총리 이상의 자리에 추대했다. 이중 상해임시정부는 '초대 국무총리'를, 한성정부는 '집정관'으로 추대했다.     이승만의 미국내 영향력은 일본의 진주만 침공으로 확대됐다. 그때까지만해도 이승만의 외교활동에 마지못해 대응 해줬던 미국정부는 이승만 박사의 저서 'Japan Inside Out'이 일본제국주의의 미국 침공을 '예언'한 책으로 선풍적인 관심을 모으자, 그를 인정했다.     해방을 맞이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이승만 박사는 선거를 통해 건국 대통령에 취임한다. 공산주의를 혐오했던 이 대통령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와 미국 중심의 '민주주의'의 대결에 있어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도 일찍 주목했으며, '한미동맹'만이 대한민국을 발전시킬 유일한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미국의 힘과 미국민들의 생각, 그리고 미국을 움직이는 기업인들과 정치인들의 정서를 이해했기에 가능한 분석이었다.     한국전쟁 중 '북진통일'만을 주장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이 1953년 6월 휴전에 사실상 잠정 합의하자 3만여명의 반공포로를 전격 석방하며 맞섰다. 미국은 '이승만 제거 작전'까지 검토했으나 의회가 "반공투사 이승만을 버릴 수 없다"고 반대하자 물러섰다. 그 대신 역사적인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2억 달러 원조, 한국군 강화 등 거의 모든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를 들어준다.  이런 내용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사실상 한국과 미국을 거의 모든 분야에서 결속시키는 힘을 발휘하며 대한민국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양동자 박사는 "이 업적 하나만으로도 이 대통령은 '국부'로 추앙받을 충분한 역할을 한 셈"이라고 강조한다.    양 박사는 "40년의 대미 외교 경험, 고급 영어 구사 능력, 그리고 누구보다도 투철한 애국심이 그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가졌던 건국 대통령으로서의 자질"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양 박사는 "그런 이 대통령의 주무대였던 워싱턴에 기념관을 설립하고, 미국의 차세대, 차차세대 동포들이 이 대통령을 배울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나는 물론 우리 세대의 사명"이라고 역설했다.     범동포적인 '워싱턴 이승만 기념관' 건립 추진을 구상하고 있는 양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구미위원회 및 주거지로 사용한 워싱턴 DC 16가의 건물을 구입해 기념관으로 세운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현재 교회로 사용중인 건물의 구입을 위해 양 박사는 구체적인 협상을 진행중이라고 알렸다. 현재까지 한국 정부의 지원을 타진한 바 없으나, 워싱턴 DC의 주미대한제국 공사관의 구입해 성공적으로 개관한 국외소재 문화재 재단의 협조도 구상할 수 있다고 밝혔다.     대학 시절 4.19를 겪었다는 양동자 박사는 그 당시에도 이승만 박사의 동상을 끌어내리는 성난 시위대를 보고 "이해할 수 없었고, 일말 분노했다"고 회상했다. 이기붕 부통령을 중심으로 부패한 자유당 정권이 진행한  3.15 부정선거에 노령의 '국부'는 모든 책임을 떠안고, 하야했고, 미국으로 떠나 쓸쓸히 생을 마쳤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애잔함은 단순히 양 박사 뿐만이 아닌 그 당시 평범한 다수의 국민들이 느낀 공통적인 안쓰러움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이 된지 1년 만에 워싱턴을 방문했다.  7월28일 상하원합동회의에서 이승만은 다음같이 말했다.  "나도 여러분처럼 워싱턴이나 제퍼슨이나 링컨에게서 영감을 받아왔다. 나도 여러분처럼 여러분의 영광스러운 선조들이 전인류를 위해 추구했던 자유를 수호하겠다고 스스로 맹세해 온 사람이다."     미국의 자유민주주주의를 대한민국에 도입한 건국 대통령. 5000년 역사에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 한민족의 영광을 사실상 설계해 실현시킨 이 대통령의 빛나는 업적을 되새길 '기념관' 하나 쯤 워싱턴에 반드시 세워져야 한다고, 노구의 이승만 연구가 양동자 박사는 힘주어 말했다. 박세용 기자 [email protected]광복절 건국절 건국기념일 대한민국 기념관 건립 건국 대통령

2023-08-21

[사설] ‘도산 기념관’ 시간 많지 않다

한인사회의 정신적 지주인 도산 안창호 선생을 기리기 위한 ‘도산 기념관’ 건립 일정이 마침내 공개됐다. 미주도산기념사업회 측은 지난주 ‘연내 조감도 발표 및 건립위원 위촉, 내년 6월까지 설계도 완성, 2025년 8월 착공’이라는 로드맵을 발표했다. 고 홍명기 회장이 지난 2019년 기념관 건립 의지를 밝힌 이후 4년 만의 결실이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기념사업회가 이룬 성과다.       도산 기념관은 도산의 흔적이 남아있는 리버사이드 지역에 건립된다. 리버사이드 시가 제공한 시트러스 파크 주립공원 인근 8.9에이커 부지에 세워진다.         기념사업회 측은 기념관을 한인 차세대를 위한 역사 교육의 장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다. 아울러 한 인사화와 한국의 미래를 보여주는 공간도 마련해 차세대들이 자긍심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또 300~500석 규모의 다목적홀을 만들어 타 커뮤니티와의 접점도 넓힐 계획이다.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건축 비용의 확보다. 하지만 아직 기념사업회 측은 예상 건축 비용과 조달 방법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기념관 착공을 위해서는 조감도와 설계도면 제작 등 기초 작업에도 상당한 비용이 들어간다. 기념사업회 측이 이에 필요한 비용이라도 확보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또한 기념관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서는 완공 후 운영비용 확보 방안도 미리 마련해야 한다.     기념관에 전시할 내용물 확보도 중요하다. 도산 선생과 관련된 알찬 내용물들이 갖춰져야 제대로 기념관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념사업회가 밝힌 일정대로 사업이 진행된다면 착공까지 2년의 시간이 있다. 그러나 이는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관계자들의 분발이 요구되는 이유다.     소리만 요란했지 사업 추진은 지지부진한 한미박물관과 같은 일이 또 벌어져서는 안 된다.      사설 기념관 도산 도산 기념관 기념관 착공 기념관 건립

2023-08-16

[기고] ‘이승만대통령기념관’ 추진 의미

지난달 28일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김황식 전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이승만대통령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가 발족해 민관 합동으로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기로 했다. 추진위는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자유의 가치가 다시 확립되고 한미동맹이 재건되고 있다”며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되찾는 길에서 꼭 해야 할 것이 우남 이승만 대통령을 재평가하는 일”이라고 했다.   사실 이 전 대통령은 긍정적 평가보다 정파와 이념, 시대조류에 편승 저평가된 부분이 많았다. 그나마 이제라도 ‘이승만대통령기념관건립’이 추진되어 다행이다.   이 전 대통령의 미국에서의 활동은 대단했다. 이 전 대통령은 1941년 8월 초 ‘일본 내막기’를 출간해 일본의 군사적 팽창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 대응을 촉구했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펄 벅이 썼다. 그녀는 서평에서 “미국인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책은 미국인들을 위해 집필되었으며 지금이야말로 미국인들이 이 책을 읽어야만 할 때이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이것이 진실임을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이 서평은 뉴욕에서 발간되던 월간 잡지 ‘아시아’의 1941년 9월호에 실렸다.     이 책은 미국 대통령과 국무장관 및 육군장관 등에게도 보내졌다. 결국 같은 해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전 대통령은 일본의 본성을 아는 해안을 가졌다. 또 이 전 대통령은 1945년 2월 미·영·소 세 나라가 모인 얄타회담에서 전후 한반도를 소련의 세력범위 하에 두기로 밀약을 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당시 미국의 대표 언론그룹 소유주인 허스트 캐슬에게 보냈다.     이 전 대통령은 “귀하와 같은 언론계 인사들이 그것을 국민에게 알려주어야 한다”면서 “만일 이러한 일을 저지하지 못한다면 미국의 아들들은 앞으로 15년 이내에 제3차 세계전쟁을 치르기 위하여 징집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후 허스트 계열의 신문들이 일제히 얄타 밀약설을 보도하자 국무장관 대리 그루는 6월 8일 얄타회담에서는 전후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선언에 위배되는 어떠한 비밀협정도 체결된 바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전 대통령이 출처가 분명치 않은 얄타 밀약설을 제기한 배경에는 그의 뿌리 깊은 반소·반공의식과 루스벨트 행정부의 대소 유화정책에 대한 깊은 우려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졌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망으로 한반도가 해방되었지만 38선을 중심으로 남쪽은 미국이, 북쪽은 소련이 신탁통치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33년간의 미국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1945년 10월 16일에 귀국했다. 그 후 독립촉성중앙협의회 회장,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장,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민족통일총본부 총재 등을 맡으면서 미·소가 합의한 신탁통치안 반대, 좌우합작 반대,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거부 등 반탁·반공노선을 견지했다.   이 전 대통령은 1946년 12월부터 워싱턴을 방문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 불가피론을 주창하며 로비활동을 전개했다. 이듬해 3월에 발표된 ‘트루먼 독트린’은 반공 노선의 입지를 강화해 주었다. 그 후 유엔 총회의 결의에 따라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제헌국회가 구성되자 초대 국회의장에 이 전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이후 그는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에 올랐다. 이 전 대통령은 대통령 3선에 성공했지만, 부정선거로 인해 4·19혁명이 일어나자 1960년 4월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하와이로 떠났다. 서거 후에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이 전 대통령 사후 58년 동안 “건국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을 설립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꾸준히 있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의 공과를 놓고, 진영에 따라 평가가 엇갈리면서 기념관 건립 시도는 매번 좌절됐다. 그의 과거 행적에 대한 일각의 폄훼·왜곡 시도도 끊이지 않았다. 늦었지만 후손들에게 선조들이 어떻게 나라를 만들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박철웅 / 일사회 회장기고 이승만대통령기념관 추진 이승만 대통령 얄타 밀약설 기념관 건립

2023-07-24

법원, 시민단체의 오바마기념관 건립 저지 소송 기각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기념관 건립 부지를 놓고 시카고 시민단체와 오바마 측이 벌인 긴 법정 싸움이 사실상 종료됐다.   4일 연방법원 일리노이 북부지원(시카고 연방법원) 존 블레이키 판사는 전날, 시카고 시민단체 '프로텍트 아워 파크스'(POP)가 오바마 기념관 건립 강행을 저지하기 위해 제기한 가장 최근 소송을 기각했다.   POP는 작년 4월 제기한 이 소송에서 1974년 국립사적지로 등재된 유서 깊은 시민공원 잭슨파크에 오바마 기념관이 들어설 경우 미치게 될 부정적 영향을 연방 당국이 묵과했다고 주장했다.   오바마 기념관에 대해 미 국립사적지 보존법(NHPA)과 국가 환경정책법(NEPA) 등의 위반 가능성이 제기되자 연방 도로청(FHA)은 2017년 4월 환경영향평가에 착수했고 2019년 7월 "오바마 기념관이 잭슨파크 내 주요 건축물들의 의미를 축소하고 역사적 가치가 있는 국가 재산의 고결성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주민 휴식공간을 침해하고 생태환경을 파괴할 수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놓은 바 있다.   그러나 작년 1월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틀 만에 승인이 떨어졌고 오바마 측은 작년 4월 착공을 위한 사전공사에 착수했다. 이어 작년 9월 오바마 부부와 일리노이 주지사 시카고 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공식 착공식을 가졌다.   POP는 공사 시작에 앞서 법원에 '사전 금지명령'을 요청했으나 블레이키 판사는 "원고 측이 승소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며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이어 전날 해당 소송에 대해 정식 기각 판결을 내렸다.   블레이키 판사는 이번 판결에 대해 "원고와 피고 사이에 실제적 분쟁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이로써 오바마 측은 수많은 논란과 법정 공방으로 예정보다 4년 이상 늦춰진 기념관 건립 공사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됐다.   시카고에서 지역사회 운동가로 활동하다 일리노이 주상원의원(1997~2004)•연방상원의원(2005~2008)을 지낸 오바마는 대통령 재임 당시인 지난 2015년 잭슨파크를 기념관 건립 부지로 선택, 공표했다.   오바마 기념관은 애초 2017년 착공해 2020년, 늦어도 2021년 개관할 예정이었으나 각종 논란과 송사에 휘말려 좌초 위기까지 갔었다. 새로운 개관 목표 시점은 2025년이다. 시카고=연합뉴스 김 현 기자오바마 시민단체 기념관 건립 시카고 시민단체 대통령 기념관

2022-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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